“길이 없는데요.” 엘리안이 말했다.
“있어.” 브라이스가 말했다.
“…물에 잠겼잖아요.”
옛 국경길이 흙탕물에 잠겨 있었다. 봄 융설에 늪이 넘쳤다. 브라이스가 노려봐도 물은 안 말랐다.
“길은 있어. 너희가 못 볼 뿐이지.”
바위에 웬 사내가 걸터앉아 사과를 깎고 있었다. 언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마르고 조용한 인상. 발소리도 없었다.
“저 물, 세 시간 뒤 반쯤 빠져. 오른쪽 갈대밭 밑에 옛 둑길 있고. 안내는 은화 두 닢.”
“한 닢.” 브라이스가 말했다.
“두 닢. 안 급하면 나흘 돌아가든가.”
보스크가 은화 두 닢을 던졌다. “탈 로우.” 사내는 그게 소개의 전부였다.
세 시간 뒤, 정말 물이 빠졌다. 갈대밭 밑에 둑길이 드러났다. 탈은 마법 없이 땅만 읽었다. 물이 어디로 빠지는지, 진흙 색이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런 걸.”
“안 죽으려고 배웠어.” 탈이 짧게 답하고 입을 닫았다.
브라이스가 낮게 웃었다. “말 많은 놈보단 낫네.”
문제는 그날 밤이었다.
폐초소에서 하룻밤 묵었다. 엘리안은 잠이 안 왔다. 뒤척이다 봤다. 탈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초소 뒤, 바위 그늘에서 낮은 목소리들. 엘리안이 다가갔다. 탈이 후드 쓴 낯선 둘과 마주 서 있었다. 작은 꾸러미가 오갔다. 낯선 자들이 어둠으로 사라졌다. 딱 한 마디만 들렸다. “…국경 넘기 전에.”
물러서다 돌부리를 찼다. 탈이 홱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안 자?”
“…목말라서요.” 엘리안이 빈 물통을 흔들었다.
탈은 아무 말 없이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해명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엘리안의 물통은 가득 차 있었다. 밤새 비었던 물통이. 누가 채웠는지 아무도 말 안 했고, 탈은 벌써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밤엔 의심했는데, 아침엔 말없이 물을 채워 놨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아침, 초소를 나서려는데 엘리안의 귀가 곤두섰다. 문틀에 죽은 에오르가 가늘게 흘렀다. 옛 전쟁 때의 함정. 문 열면 터진다.
“멈춰요!” 엘리안이 브라이스의 팔을 잡았다. 문고리 직전이었다.
눈을 감고 배선을 따라갔다. 삭은 매듭. 얇아진 지점을 짚어 흙을 긁었다. 배선이 툭 끊겼다.
“…열어도 돼요.”
브라이스가 문을 열었다. 아무 일 없었다. 그가 정수리를 헝클었다. “잿밥치고 쓸 만해.”
“그 별명 좀.” 엘리안이 인상 썼지만, 솔직히 조금 우쭐했다.
문밖으로 골짜기가 펼쳐졌다. 천막이 빼곡했다. 수백, 수천. 창날이 아침 햇빛에 번들거렸다. 벨렌 징집병이 국경으로 모이고 있었다.
“전쟁 나요?”
“‘나요’가 아니라 ‘올 거야’지.” 브라이스의 장난기가 걷혔다. “저 애들 절반은 농사꾼이야. 창 잡는 법도 몰라.”
그 옆에서 탈이 조용히 다른 쪽을 봤다. 검게 그을린 골짜기. 불탄 숲 자리. 사과 깎던 손이 멈췄다.
“저기 살던 사람들.” 탈이 먼저 입을 뗐다. 묻지도 않았는데. “불났을 때 난 이 능선에 있었어. 다 보였지. 뛰는 사람도, 안 뛰는 사람도. 근데 못 내려갔어. 무서워서.” 그가 다시 걸었다. “…그래서 지금은, 내려가.”
엘리안의 숨이 멎었다. 무서워서 못 움직였다는 말. 그건 그가 하렌 우물 앞에서 세 번의 숨을 삼키던, 바로 그 말이었다.
의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편이 되고 싶은 사람이기도 했다.
브라이스가 골짜기 아래를 가리켰다. 군대 너머, 큰 마을 하나에 학회 깃발이 잔뜩 꽂혀 있었다. 은빛 저울. 놋쇠 관. 펌프.
“모르윅이네.” 그가 말했다. “저 동네 큰 우물, 통째로 뽑을 셈이야. 드레이번 짓이겠지.”
엘리안의 눈이 반짝였다. 왼팔이 근질거렸다.
두렌은 마을 하나였다. 모르윅은—판이 더 컸다.
“가요.” 그가 말했다. 이미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