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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삼킨 AI가 있다고 치자. 위키피디아, 논문, 소설, 코드까지 전부. 그런데 이 AI에게 “저 컵을 넘어뜨리지 말고 옆으로 밀어봐"라고 시키면, 그 순간 무너진다. 컵이 어느 각도에서 넘어지는지, 손을 얼마나 빨리 움직이면 관성이 붙는지 — 그런 건 어떤 문장에도 적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빈틈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AI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글이 아니라, 직접 움직여볼 세계다. 그리고 그런 세계는 이미 수만 개가 존재한다 — 비디오 게임 안에.”
20억 개의 클립에 2.3조 원이 붙었다
이 주장을 돈으로 증명하려는 회사가 있다. General Intuition. 게임 하이라이트 앱 Medal에서 분사한 스타트업으로, 매달 약 1,000만 명의 유저가 수만 종의 게임을 플레이하며 만들어내는 연간 약 20억 개의 게임 클립을 데이터셋으로 삼아 자율 AI 에이전트를 학습시킨다(TechCrunch).
숫자가 흥미로운 게 아니다. 이 회사에 붙은 가격표가 흥미롭다. 시드 라운드에서 1억 3,370만 달러(약 1,340억 원)를 모았고(InvestGame, 2025년 10월로 보도됨), 이후 시리즈 A에서 **3억 2,000만 달러를 유치하며 기업가치 23억 달러(약 3.2조 원)**를 인정받았다(TechCrunch).
제품 매출이 아니라 가설에 붙은 가격이다. General Intuition의 논리는 이렇다. 진짜 AGI에는 텍스트 기반 대규모 언어모델(LLM)이 갖지 못한 공간적·시간적 추론이 필요하고, 비디오 게임은 세상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시뮬레이션’한다는 것(Bitcoin World). 텍스트는 물이 아래로 흐른다고 말해주지만, 게임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장면을 겪게 한다.
게임이 AI에게 가르쳐준 것: ‘수 37’의 계보
이 아이디어가 순전히 벤처캐피털의 상상은 아니다. 이미 실적이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DeepMind의 AlphaZero다. 2017년 공개된 이 시스템은 바둑·체스·쇼기를 오직 **게임 규칙만 주어진 상태에서 자기 자신과 두는 대국(self-play)**으로 정복했다((https://deepmind.google/blog/10-years-of-alphago/)). 인간의 기보 한 판도 학습하지 않았다. 그 전신인 AlphaGo가 이세돌과의 대국에서 둔 ‘수 37’은, 프로 기사들이 “실수 아니냐"고 의심했다가 나중에 신의 한 수로 판명된 착점이었다. 인간의 예시를 벗어난 곳에서 새로운 전략을 스스로 발견한다는 것 — 강화학습의 핵심 매력이 여기 있다.
더 인상적인 건 그다음이다. MuZero는 규칙을 아예 알려주지 않고도 환경의 작동 원리(dynamics) 자체를 학습해 바둑·체스·쇼기는 물론 아타리 게임까지 넘나들었다(arXiv). 그리고 이 ‘게임에서 갈고닦은’ 탐색·계획 기법은 게임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단백질 접힘을 풀어낸 AlphaFold 2, 국제수학올림피아드(IMO) 은메달 수준에 도달한 AlphaProof가 그 후예다((https://deepmind.google/blog/10-years-of-alphago/)). 게임 정복용 기술이 과학 문제로 일반화된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게임 데이터=AGI 열쇠"라는 문장이 꽤 그럴듯해진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한 발 물러서고 싶다.
열쇠는 ‘데이터’가 아니라 ‘방법’이었다
AlphaZero와 MuZero가 증명한 것을 정확히 짚어야 한다. 이들이 위대했던 건 유튜브에서 긁어온 게임 영상 20억 개를 봤기 때문이 아니다. 규칙이 명확한 세계 안에서, 스스로 무한히 시도하고 실패하며 보상 신호를 좇았기 때문이다. 즉 진짜 열쇠는 클립이라는 데이터가 아니라 self-play와 강화학습이라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General Intuition이 파는 건 방법이라기보다 데이터다. 게이머들이 만든 방대한 클립 안에 물리·인과·관성·3차원 이동 같은 정보가 정적 텍스트에는 없는 형태로 담겨 있다는 것(Bitcoin World). 매력적이다. 하지만 남이 플레이한 영상을 ‘보는’ 것과, 스스로 조작하며 ‘겪는’ 것 사이에는 여전히 건너야 할 강이 있다.
31% vs 71%, 그리고 아직 없는 논문

현실 점검을 하나 하자. DeepMind가 2024년 3월 공개한 SIMA는 「No Man’s Sky」「발헤임」「고트 시뮬레이터 3」 등 상용 게임 9종으로 학습해, 처음 보는 3D 세계에서도 자연어 지시 600여 개를 따르는 범용 에이전트다((https://deepmind.google/blog/sima-generalist-ai-agent-for-3d-virtual-environments/)). “언어로 지시하면 낯선 게임 세계에서 행동한다” — General Intuition의 비전에 가장 근접한 실물이다.
그런데 성능을 보면 겸손해진다. SIMA 1은 복잡한 3D 게임 과제에서 **성공률 31%**에 그쳤다. 같은 과제에서 **사람은 71%**였다((https://deepmind.google/blog/sima-generalist-ai-agent-for-3d-virtual-environments/)). 게임으로 학습한 에이전트는 여전히 인간에 한참 못 미친다. 잘 통제된 게임 안에서도 이 정도인데, 규칙도 목표도 명확하지 않고 물리도 시뮬레이션이 아닌 진짜인 현실 세계로 넘어가면 격차는 더 벌어질 공산이 크다.
여기에 더 정직해질 부분이 있다. General Intuition은 게임 데이터가 ‘범용 현실 지능’을 만들어낸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발표된 연구나 측정 가능한 결과를 아직 내놓지 않았다(TechCrunch). 3.2조 원의 기업가치는 성과가 아니라 여전히 가설의 가격이다.
게임의 근본적 한계도 짚어야 한다. 게임에는 잘 정의된 규칙, 명확히 경계 지어진 목표, 그리고 진짜가 아닌 시뮬레이션된 물리가 있다. 게임 안에서 배운 기술이 현실의 지저분함 — 예측 불가능한 변수, 애매한 목표, 진짜 중력 — 으로 깔끔하게 옮겨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열쇠인가
내 결론은 이렇다. 게임 데이터는 AGI의 유일한 열쇠는 아니지만, 진짜 열쇠 하나가 꽂힐 열쇠 구멍일 수는 있다.
텍스트만 먹인 AI는 세상을 읽기만 했지 살아본 적이 없다. 그 한계는 실재하고, 게임이라는 값싸고 무한하며 안전한 시뮬레이션 세계는 그 빈틈을 메울 가장 현실적인 후보다. AlphaZero부터 AlphaFold까지의 계보는 이 방향에 실체가 있음을 이미 보여줬다.
다만 ‘게임 클립을 많이 모으면 AGI가 나온다’는 문장은 아직 마케팅에 가깝다. 20억 개의 클립보다 중요한 건, 그 안에서 에이전트가 얼마나 잘 행동하고, 틀리고, 다시 시도하도록 만드느냐다. 31%를 71%로, 그리고 71%를 게임 밖으로 끌어낼 방법 — 그게 증명되기 전까지 3.2조 원은 결과가 아니라 믿음의 크기다.
그러니 다음에 이런 헤드라인을 보면 한 가지만 확인하자. “측정 가능한 결과가 있는가, 아니면 아직 아름다운 가설인가.” 지금 이 게임의 스코어보드는, 솔직히 말해 아직 켜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