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벤처 자금 100원 중 61원이 작년 한 해 AI 한 단어를 향해 흘러갔다. 그런데 그 강물 옆에 서 있는 한국 창업자들의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마르고 갈라져 있다. “돈이 넘친다며. 근데 내 통장은 왜 이래?” 강은 분명히 흐르는데, 물이 닿는 밭은 몇 뙈기 안 된다. 이 글은 그 마른 밭에 관한 이야기다.
61%라는 숫자가 실제로 뜻하는 것
먼저 숫자부터. 2025년 전 세계 벤처 자금의 61%가 AI 기업으로 흘러갔다. OECD가 2026년 2월 내놓은 분석에 따르면, 전체 벤처 투자 4,271억 달러 가운데 AI 관련 기업이 2,587억 달러를 삼켰다. 2022년만 해도 이 비중은 30% 언저리였다. 3년 만에 두 배로 부푼 셈이다(OECD, 2026).
숫자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여기서 한 번 멈칫할 것이다. 61%는 사실 가장 높이 부른 값이다. PitchBook은 2025년 상반기 기준 53%, Crunchbase는 연간 약 50%로 본다(Crunchbase, 2025). 집계 기관마다 렌즈가 다르니 초점 거리도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어느 렌즈로 봐도 사진은 똑같이 찍힌다. 세계 벤처 자본의 절반 이상이 단 하나의 키워드에 쏠려 있다. 이 정도의 편중은 닷컴 버블 이후 처음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하다. 문제는, 이 문장을 “그러니 AI를 하면 돈이 온다"로 읽는 순간 함정에 빠진다는 것이다.
열풍의 진짜 얼굴: 돈은 몰리되, 몇 개의 밥그릇에만
강물의 흐름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렇다. 물은 넘치는데, 그 물을 다 받아 마시는 입은 놀랄 만큼 적다.
2025년 AI 투자액의 약 73%가 이른바 ‘메가딜’에 집중됐다. 10억 달러를 넘는 초대형 라운드 하나하나가 전체 AI 투자액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다(OECD, 2026). 쉽게 말해 OpenAI, Anthropic, xAI 같은 파운데이션 모델 기업 몇 곳이 파이 한 판에서 가장 큰 조각들을 먼저 잘라 갔다는 얘기다. 남은 부스러기를 나머지 수천 개 회사가 나눈다.
이 구조를 냉정하게 뜯어보면 세 가지가 보인다.
- 자본은 ‘수렴’하고 있다. 총액은 사상 최대인데, 그 돈이 닿는 회사의 수는 오히려 줄었다. 파이는 커졌는데 나이프는 몇 자루뿐인, 전형적인 승자독식 구간이다.
- 모델 계층의 경쟁은 이미 판이 짜였다. 수백억 달러짜리 학습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 열 곳도 안 된다. 후발 주자가 ‘더 좋은 범용 모델’로 이들을 정면에서 이기겠다는 건, 자본 논리상 맨손으로 댐을 미는 일에 가깝다.
- 그래서 빈자리는 ‘위’가 아니라 ‘옆’과 ‘아래’에 있다. 모델을 만드는 싸움이 아니라, 그 모델을 특정 산업·언어·규제에 맞게 ‘입히는’ 싸움. 거인들이 발밑을 내려다볼 겨를이 없는 그곳이 아직 비어 있다.
정리하면, 61%는 “AI를 하라"는 응원이 아니다. “어디서 싸울지 골라라"는 지도다. 응원인 줄 알고 링 한복판으로 뛰어든 사람만 다친다.
한국의 상황: 지갑은 닫히는데, AI 라벨만 커진다
한국 시장은 이 그림의 축소판이다. 다만 결이 한 겹 더 얄궂다.
2025년 한국 스타트업·중소기업 대상 투자는 총 1,155건, 약 6조 5,724억 원이었다. 여기서 눈을 크게 떠야 할 대목—투자 ‘금액’은 전년과 비슷했는데, 투자 ‘건수’는 뚝 떨어졌다(THE VC, 2025). 같은 양의 물을 더 적은 그릇에 부었다는 뜻이다. 한 그릇당 양은 늘었지만, 그릇을 아예 받지 못한 창업자가 그만큼 많아졌다. 세계에서 관찰된 ‘수렴’이 여기서도 판박이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물줄기가 향하는 곳은 선명하게 AI다.
- 한국 벤처투자에서 AI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9.4%에서 2025년 23.6%로 뛰었다.
- 업력 1년 이내 초기 스타트업에 들어간 투자금은 절반 이상이 AI 관련이었다.
- 2025년 투자를 유치한 비상장 스타트업 중 AI 관련 기업은 총 263개로 집계됐다(THE VC, 2025).
상반기만 떼어 봐도 스타트업 투자는 7.8조 원으로 이미 전년 한 해 치를 넘어섰고, 그 상승분의 상당량이 AI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분석도 있다(플래텀, 2025).
그러니 지금 한국 창업자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당기는 두 개의 밧줄 사이에 매달려 있다. 한쪽 밧줄은 ‘건수 감소’—지갑이 전반적으로 닫힌다. 다른 쪽 밧줄은 ‘AI 라벨’—그 라벨 붙은 곳으로만 돈이 쏠린다. 이 팽팽한 틈이 곧 위기이자, 동시에 유일하게 발 디딜 자리다.
그래서, 한국 스타트업은 어디를 파야 하나
“거대 모델 경쟁엔 못 낀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나면, 오히려 시야가 트인다. 못 하는 걸 지워야 할 수 있는 게 보인다. 아래는 데이터가 가리키는 방향을 삽질 가능한 언어로 옮긴 것이다.
1) 모델을 만들지 말고, 모델을 ‘입혀라’
61%가 파운데이션 모델로 갔다는 건, 뒤집으면 그 모델을 가져다 쓰는 응용 계층은 아직 헐값이고 경쟁도 덜하다는 뜻이다. 이미 성능이 검증된 상용 모델(Claude, GPT 계열 등)을 특정 산업의 업무 흐름 속에 깊이 박아 넣는 쪽이, 자본 효율이 비교가 안 되게 높다. 학습비 수백억이 아니라 API 비용과 도메인 전문성으로 붙는 게임이다.
질문의 방향부터 바꿔야 한다. “AI로 뭘 만들까"가 아니라 **“지금 어느 산업의 어떤 반복 업무가 사람 손목에 수갑처럼 묶여 있나”**를 먼저 찾는 것. 법무, 회계, 물류, 제조 품질검사처럼 규제가 빡빡하고 데이터가 문 걸어 잠긴 영역일수록, 글로벌 빅테크가 직접 들어오기 껄끄럽다. 거인이 몸을 못 굽히는 그 좁은 문이 당신의 문이다.
2) ‘한국어·한국 규제’라는 해자를 얕보지 마라
글로벌 모델은 영어권 데이터를 젖먹고 자랐다. 한국어의 미묘한 결, 계약서 뒤에 깔린 관행, 개인정보보호법·전자금융거래법 같은 국내 규제의 지뢰밭—여기엔 아직 큰 구멍이 뚫려 있다. 이 로컬 컨텍스트는 외국 기업이 흉내 내려다 발목 잡히는 진입 장벽이 된다. 국내 초기 투자금의 절반 이상이 AI로 간 데도 이유가 있다. VC들이 바로 이 ‘한국어로 번역된 응용’에서 승산을 읽었기 때문이다.
3) 유닛 이코노믹스를 첫날부터 증명하라
투자 ‘건수’가 줄어드는 시장에서 VC의 눈은 매서워진다. “AI 붙였으니 알아서 크겠죠"라는 서사는 이제 서류 첫 장에서 반려된다. 실제로 지금 돈을 받아 가는 회사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첫날부터 매출·리텐션·종량제 원가를 숫자로 들이민다는 것. AI API는 쓰면 쓸수록 원가가 새어 나가는 종량제 수도꼭지다. 고객 한 명당 나가는 추론 비용과 그 고객이 지불하는 값의 차이—이 뺄셈이 흑자여야 회사가 숨을 쉰다. 이걸 계산해 두지 않은 채 성장하는 건, 밑 빠진 독에 투자금을 붓는 일이다.
4) 메가딜의 ‘옆’에 곡괭이를 팔아라
파운데이션 모델 기업이 커질수록, 그들을 둘러싼 도구·인프라·안전장치 시장도 덩달아 부푼다. 모델 평가, 프롬프트 관리, AI 출력 검증, 비용 최적화, 컴플라이언스 같은 사업은 모델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수요가 계속 흐른다. 골드러시에서 끝까지 안정적으로 돈을 번 건 금을 캔 광부가 아니라, 그 옆에서 청바지와 삽을 판 상인이었다. 누가 금맥을 터뜨리든, 삽은 팔린다.
5) 열풍이 식는 날의 체력을 지금 길러라
61%라는 편중은 정상 체온이 아니라 열이 오른 상태다. 언젠가 이 비율은 내려갈 것이다. 그때 살아남는 회사는 ‘돈이 몰릴 때, 돈 없이도 굴러가는 몸’을 미리 만들어 둔 곳이다. 투자 유치 자체를 결승선으로 삼지 말고, 투자가 끊겨도 굴러갈 매출 기반을 먼저 세워라.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투자를 가장 잘 받는 방법이기도 하다. VC는 돈이 급하지 않은 회사에 돈을 주고 싶어 한다.
마무리: 숫자를 신호로 바꾸는 법
“전 세계 벤처 자금의 61%가 AI로 갔다"는 한 문장은 두 가지 언어로 읽힌다. 겉면은 “AI를 하면 돈이 온다"는 축제의 언어. 그러나 데이터를 뒤집어 보면 “자본이 소수에게 수렴하니 정면승부는 피하라"는 경고의 언어가 새겨져 있다. 같은 문장, 반대 뜻. 한국 창업자에게 중요한 건 이 열풍에 몸을 던지는 게 아니라, 열풍이 만드는 그림자—사각지대를 정확히 골라 서는 것이다.
모델을 만드는 싸움은 이미 몇몇 거인이 자본으로 판을 접었다. 그러나 그 모델을 한국의 산업·언어·규제에 깊이 꿰어 넣는 싸움은 이제 막 첫 삽을 떴고, 그 링엔 아직 거인이 없다. 6조 원이 AI로 몰리되 건수는 줄어드는 지금, 승부처는 ‘더 큰 AI’가 아니다. **‘더 정확히 꽂히는 AI’**다.
이 글의 수치는 OECD(2026년 2월 발표, 2025년 연간)와 THE VC·플래텀의 국내 집계를 바탕으로 하며, 집계 기관·기간에 따라 편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투자 판단은 반드시 최신 원자료와 전문가 검토를 병행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자료
- OECD, AI firms capture 61% of global venture capital in 2025 (2026): https://www.oecd.org/en/about/news/announcements/2026/02/ai-firms-capture-61-percent-of-global-venture-capital-in-2025.html
- OECD, Venture capital investments in artificial intelligence through 2025 — Full Report: https://www.oecd.org/en/publications/venture-capital-investments-in-artificial-intelligence-through-2025_a13752f5-en/full-report.html
- Crunchbase News, Global Venture Funding In 2025 (2025): https://news.crunchbase.com/venture/funding-data-third-largest-year-2025/
- THE VC, 2025 한국 스타트업 투자 통계: https://thevc.kr/discussions/korea_startup_funding_2025
- 플래텀, 상반기 스타트업 투자 7.8조 원…AI로 쏠렸다 (2025): https://platum.kr/archives/290277
